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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语前尘】宋代理宗皇帝敕朱广用奖谕敕书石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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发表于 2017-10-29 23:29:54 | 显示全部楼层 |阅读模式
本帖最后由 静若聆音 于 2019-8-18 00:19 编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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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校对 开庆己未奖谕敕书.png


(上图为:开庆己未奖谕敕书

自校对 朱广用谢表.png


上图为:朱广用谢表


宋代理宗皇帝敕朱广用奖谕敕书石刻

    石刻勒石于宋代开庆元年(1259年),高2.30米、宽1.70米,位于宝积山北面华景洞飞云台(此台已毁)。石刻内容为宋代理宗皇帝表彰在广西抗击抵御蒙古军队官员朱广用的《奖谕敕书》以及朱广用回复皇帝的谢表。



桂林旧事:《宋代桂林的两张奖谕敕书》

    奖谕敕书,特指古代皇帝为表彰人员而颁发的诏书。史载有两张奖谕敕书被镌刻在山壁之上成为桂林石刻。一张是由于宋代崇宁元年(1102年),羁縻安化州(今广西环江县)少数民族酋首蒙光有对当地官员所事苛政不服,聚集八千余人入寇宜州,广西经略使程节调遣黄忱等将领率兵二千九百余人平蛮,后得胜而归(《宋史》卷十九、四百九十五载“二月辛亥,安化蛮入寇,广西经略使程节败之”、“崇宁二年,其酋蒙光有者复啸聚为寇,经略司遣将官黄忱等击却之”),宋徽宗赵佶于崇宁二年(1103年)为表彰程节平叛有功颁发敕书,后由龙隐岩释迦禅寺住持刻石于龙隐岩。另一张是宋代宝祐六年(1258年),大宋为抵御兀良合台带领蒙古军队从云南出兵广西的进攻,将朱广用从建康都统制的职务调至桂林驻守,并被委任统一调度周边各地的驻守军队。朱广用一到桂林就立即组织修浚加固城池、加强防务,并根据驻军将士家乡的信仰在宝积山上兴建多座佛寺、神祠以借助将士们对神、佛的信仰来提升士气、鼓励将士抵御外患。由于城池坚固、将士英勇抗击,蒙古军队侵犯至邕州后就无法再深入并撤围北去,宋军趁机尾随追击,获得了大小十余次胜利(宋代李曾伯《抗元记事碑》载“相与修浚城池为保固计,是秋鞑犯邕境赖我师遏之不致深入”、“我师昼夜攻劫,大小十余捷,贼气顿沮”);当时还由于蒙古蒙哥汗死于战争,蒙军主帅忽必烈为争夺汗位,命令放弃攻宋、主动迅速北撤,宋军获得暂时的胜利。开庆元年(1259年),宋理宗赵昀于开庆元年(1259年)为表彰朱广用抗击入侵蒙古军队取得胜利颁发的敕书。后来朱广用将宋理宗的《奖谕敕书》与自己回复皇帝的谢表一起刻在了宝积山华景洞旁飞云台上(《桂胜·桂故》卷五“朱广用,以建康都统制调戍桂。刻其所得奖敕于华景之壁”)。

《宋史》卷十九载“二月辛亥,安化蛮入寇,广西经略使程节败之”.png

《宋史》卷十九载“二月辛亥,安化蛮入寇,广西经略使程节败之”

《宋史》卷四百九十五载“崇宁二年,其酋蒙光有者复啸聚为寇,经略司遣将官黄忱等击却之”.png

《宋史》卷四百九十五载“崇宁二年,其酋蒙光有者复啸聚为寇,经略司遣将官黄忱等击却之”

宋代李曾伯《抗元记事碑》载“相与修浚城池为保固计,是秋鞑犯邕境赖我师遏之不致深入.png

宋代李曾伯《抗元记事碑》载“相与修浚城池为保固计,是秋鞑犯邕境赖我师遏之不致深入”、“我师昼夜攻劫,大小十余捷,贼气顿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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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龙隐路记》

   
    城之江东有东江,江畔山唤月牙,西南洞、岩各一;世称洞曾隐龙,洞顶龙鳞脊印蜒蜿贯彻,风云吸习、屈曲潜通,喻作回穴。有桥邻洞南、凌东江,遂衍成一路东去二里。洞、岩、桥、路皆名龙隐。今丁酉年间,桂林政通人和,使城内山水好景争显新貌,提升改造龙隐路为其一。周南太史书、捭阖之石刻呼之将出,摹现于路,由是为记。
    传曰时值天地混沌,有苍穹之北斗坠地顿化二山七峰,形呈七星。山其一之月牙,浸润漓水日月精华,神龙舞来,伴霞择栖。一旦走石飞沙、雷鸣电闪,龙既亢而醒。破壁而飞,驾云十万里,东去西循,遍寻乾坤,竟再无适栖之地。且自南悔返,行将回穴时莽撞踏破一山,以穿山名。漓水悠悠,刹那转无尽生灭,神龙既隐,水则愈灵。过往逾千年始,墨客贤人踏歌步越东江,每留笔墨诗赋,终使龙隐洞、岩摩崖殆遍,壁无完石,遂造甲天下之唐宋题名渊薮,成看山游山、观画读史之胜地。引莫休符《桂林风土记》、范成大《桂海虞衡志》、张鸣凤《桂胜》纷各书志其韵。“破壁才知龙隐处、游山方悉太史书”,登望龙台上,最盼秋风,城花木樨吐蕊、金黄万点、留客不言、芳溢十里。此番镂墙透绿、山塘成景、光影相缀、使人流连。
    夫江东久为宜居福地,之所以龙隐;善政秉持服务求精,之所以七星。兹初心不忘,恪守为民之责、修复山水生态、串拾散珠碎玉、传承千年人文。使百姓以地域而认同、以文化而自信,岂非正所为耶?

                                                                        周    琥
                                                                     二〇一七年十二月


后  记


    与桂林山水一样“甲天下”的,还有桂林石刻。而与桂林石刻一样沉淀在岁月流光里的,还有发生在桂林这片土地上的旧事。虞舜、马援、李靖、狄青、鉴真、黎桓、赵构、妥欢帖木儿、靖江王、孔四贞、孙中山等一个个历代重要历史人物对桂林的影响,远非在这里展示的40块仿制石刻与故事就能够娓娓道尽的。关于他们,我们总想多述说一些、再多述说一些。因为在龙隐路上,让游客能更多地了解桂林历史文化、爱上桂林这个地方,让市民进一步提升地域认同、增强文化自信,是我们在本次改造工程中精益求精、风雨兼程的动力。
    为传承桂林石刻文化,我们还从2017年“漫卷诗话山水情”桂林原创诗词短文征集大赛活动中择取了部分作品,勒石于此,谨法古人。
    本次改造工程有赖于桂林图书馆、桂林生活网、桂管群、广西师范大学外国语学院、市漓管委、七星景区管理处、桂海碑林博物馆的帮助,同时在专业方面还得到了凌世君、林哲、林志捷、秦冬发、王晶、毛建军、杨曦明、黄柯等诸位贤达的悉心指导。在此一并致谢!

                                                        桂林市七星区特色街区改造指挥部
                                                        指 挥 长:石玉琳、郑  平
                                                        副指挥长:周  琥
                                                        二〇一七年十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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发表于 2017-10-31 19:13:44 | 显示全部楼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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发表于 2017-11-2 22:27:14 | 显示全部楼层
这块石刻风化太严重了,很可惜,全宋文好像也未收入。当年蒙古兵沿右江而下,目的不在于攻城掠地,而是直奔长沙会师。李曾伯防守右江无功,幸好保住了静江城也保住了鸟纱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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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楼主| 发表于 2017-11-5 02:09:47 | 显示全部楼层
走出溪峒 发表于 2017-11-2 22:27
这块石刻风化太严重了,很可惜,全宋文好像也未收入。当年蒙古兵沿右江而下,目的不在于攻城掠地,而是直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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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楼主| 发表于 2017-11-5 02:14:09 | 显示全部楼层
      

朱广用奖谕敕书

朱广用奖谕敕书

朱广用奖谕敕书2

朱广用奖谕敕书2

朱广用奖谕敕书3

朱广用奖谕敕书3

朱广用奖谕敕书4

朱广用奖谕敕书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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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年度人文达人

发表于 2017-11-5 22:41:03 | 显示全部楼层
桂林博物馆应该专门开设一个桂林摩崖石刻拓片馆,把所有石刻拓片集中展示,这是桂林历史中最宝贵的文化财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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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楼主| 发表于 2018-1-24 23:49:33 | 显示全部楼层
本帖最后由 静若聆音 于 2018-6-10 21:06 编辑

感谢广西师范大学外国语学院组织的翻译工作



【日文】



朱広用を表彰する宋の理宗皇帝の「奨諭勅書」の石刻

現物の石刻は宝積山の北面の華景洞の飛雲台(この台は今もう毀れた)にあり、高さ2.3メートル、幅1.7メートルで、宋代開慶元年(1259年)に刻まれたものです。その内容は広西で蒙古軍を抵抗した官員の朱広用を表彰する理宗皇帝の『奨諭勅書』及び朱広用の謝辞です。

桂林の宋代皇帝からの奨諭勅書二枚

奨諭勅書は特に皇帝が人を表彰するために発給した詔書と指します。史料記載では桂林の岩壁に奨諭勅書を二枚刻んであります。宋代寧元年(1102年)、安化州(今広西環江県)における少数民族の首領の蒙光は現地官員の苛政を不服して、八千余りの人を集めて宜州へ攻撃しました。広西経略使の程節が差し向けた黄忱などの将領は二千九百余りの兵士を率い、南蛮を平定し、最終凱旋してきました(『宋史』十九巻では「二月辛亥、安化蛮入寇、広西経略使程節敗之」とし、四百九十五巻では「寧二年、其酋蒙光有者複嘯聚為寇,経略司派遣将官黄忱等撃却之」とした)。程節の反乱を鎮めた功績を表彰するために崇寧二年(1103年)に宋徽宗趙佶が発給した勅書は、龍隠岩の釈迦禅寺の住持により龍隠岩に刻まれました。宋代宝祐六年(1258年)に、宋は兀良合台(ツウリャンホウタイ)がモンゴル軍隊を率い、雲南から出兵し、広西へ進攻することを抵抗するために、朱広用を建康都統制の職務から桂林に派遣し、周辺各地の軍兵を統一に調達する権力のある駐屯の将軍と任命されました。桂林に着いたや否や、朱広用は河川を補修したり、城壁を強固させたり、防衛を強化させたりすることを組織しました。彼は駐屯将士(将軍と兵士)達の元の信仰を尊重して宝積山に仏寺や神祠を何軒も建立し、将士達の神仏に対する信仰を利用して士気を立て、外患を抵抗するように鼓舞しました。城壁の強固と将士の英雄気概のお陰で、モンゴル軍隊は邕州まで侵犯した後、一層侵入す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撤退して北へ行きました。宋軍は機会を掴んで追撃し、大きかれ小さかれの勝利(宋代の李曾伯は『抵元記事碑』で「相与修浚城池为保固计,是秋鞑犯邕境赖我师遏之不致深入」、「我师昼夜攻劫,大小十余捷,贼气顿沮」と書きました)を十回ぐらい取りました。当時、モンゴルの王である蒙哥汗が戦死したので、モンゴルの主帥フビライは王位を奪うために、宋に対する攻撃を放棄して、迅速に北へ戻り、宋軍は一時の勝利を得ました。開慶元年(1259年)に、宋の理宗皇帝趙昀は開慶朱広用がモンゴル軍隊を抵抗し、勝利を得たことを表彰するために勅書を発給しました。その後、朱広用は自分の謝辞とその勅書を一緒に宝積山の華景洞の飛雲台に刻みました(『桂勝・桂故』五巻では「朱広用、以建康都統制調刻其所得奨勅于華景之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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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楼主| 发表于 2019-6-23 00:48:18 | 显示全部楼层
주광용을 표창한 송리종 황제의 칙서 석각
원 석각은 송나라 개경원년(1259년)에 만들어졌는데 높이는 2.30미터, 너비는 1.70미터이며 보적산 북쪽 화경동비운대에 있다(이미 훼손되었음). 석각에는 광서에서 몽골군과 싸워 이긴 주광용을 표창한 송리종 황제의 「장유칙서」와 주광용이 황제에게 쓴 감사의 글이 적혀있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계시는 석각은 모조품입니다.】
코멘트에 참여하고 싶으시거나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실 경우, 다음 QR코드를 스캔하여 계림인포럼을 이용해 주십시오
【계림 옛이야기】
송나라 시기 계림의 장유칙서 두 장
장유칙서는 고대에 표창받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황제의 조서를 가리킨다. 기록에 따르면, 두 장의 장유칙서가 계림에 석각으로 남아있다. 그중 하나는, 송나라 숭녕원년(1102년), 현지 관원들의 가혹한 정치에 불만을 품은 기미안화주(지금의 광서 환강현) 소수민족 추장 몽광유가 8000여 명을 끌어모아 의주로 쳐들어갔을 때, 광서 경략사 정절이 황정 등 장군과 병사 2900여 명을 거느리고 몽광유를 평정하고 받은 것이다. (『송사』 19권, 제495장에 따르면, “신해년 2월, 안화 야만족들이 침입하자 광서 경약사 정절이 그들을 평정하였다.” “숭녕2년, 추장 몽광유가 사람들을 집결하자 경약사는 장군 황정 등을 파견해 몽광유를 공격하였다.”) 송휘종 조길은 숭녕2년(1103년), 정절이 반란을 평정한 것을 표창하기 위해 칙서를 수여했으며 후에 용은암 석가선찰의 주지가 이를 용은동에 새겨놓았다. 다른 하나는 송나라 보우 6년(1258년)에 받은 것이다. 울량합대가 몽골군을 거느리고 운남에서 광서를 공격할 때, 송나라는 건강도통제를 맡은 주광용을 계림에 파견해 성을 지키게 했으며 주변 각지의 군대들도 관리하게 하였다.
주광용은 계림에 도착하자마자 성과 국방 사무를 강화했으며, 주군 군사들의 고향풍습에 따라 보적산 위에 많은 사원과 신사를 지어 신과 부처님의 힘을 빌어 사기를 높이게 했고 병사들을 격려하여 외환에 저항하게 하였다. 성지가 견고하고 장병들이 용감하게 싸운 덕에 옹주까지 쳐들어 간 몽고군대는 북쪽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송나라 군대는 기회를 놓칠세라 뒤를 추격하여10여 차의 승리를 거두었다.(송나라 이승백의 「항원기사비」에 따르면, “성지를 만들어 적들이 옹주까지 침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아군이 용맹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옹주까지 쳐들어 온 몽고군대는 더 들어올 수 없었다. 우리는 밤낮으로 공격하여 10여 차의 승리를 거두었고 적군은 기세가 죽었다.”) 당시 몽칸은 전사하고 총사령관 쿠빌라이는 왕위를 쟁탈하기 위해 송나라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신속하게 철수하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송나라 군대는 잠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개경원년(1259년), 송리종 조윤은 주광용이 몽골군과 싸워 승리한 것을 표창하기 위해 칙서를 수여하였다. 후에 주광용은 송리종의 「장유칙서」와 자신이 황제에게 보낸 감사의 글을 보적산 화경동 비운대에 새겨놓았다.(『계승·계고』 5권에 따르면, “주광용은 강도통제를 세워 계림을 지켰으며 상으로 받은 칙서를 화경 벽에 새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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