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积分
- 1275
- 魅力
- 115
- 金币
- 73
- 注册时间
- 2006-8-25
|
楼主 |
发表于 2019-6-23 00:44:42
|
显示全部楼层
IP属地:广西
송나라 정강부 성지도
원 석각은 북문 앵무산 중턱에 있으며 높이는 3.38 미터, 너비는 3.24미터이다. 그림 위에 있는 ‘이제사’, ‘주경략’, ‘조경략’, ‘금임호경략’은 각각 이증백, 주사손, 조여빈, 호영 등 네 명의 축성 관원을 가리킨다. 이로부터 그림은 함순 8년에 송나라 호영이 축성하면서 그린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강부 성지도의 축척은 남북 방향 약 1:1000, 동서 방향 약 1:750이다. 남송 말년, 계림 성지의 규모와 도시 구도를 반영한 평면도는 36개의 도판 기호로 산, 수, 성, 지, 문, 누, 구, 거, 정,대, 관서, 병채, 도로, 교량과 식물피복에 대해 상세하게 표기함으로써 기호화 제도의 첫 사례가 되었다. 성지도에는 또한 몽골군의 침범을 막기 위해, 보우 6년부터(1258) 함순 7년까지 계림성을 확장하였는데 동쪽은 이강 연안, 남쪽은 청대교, 서쪽은 유마산, 노인산, 북쪽은 앵무산, 철봉산까지였다고 적혀 있다. 이로부터 “산을 벽으로 삼고, 강을 못으로 삼아” 산세의 흐름에 따라 산, 수, 성이 어우러진 계림 도시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대가 이르고, 보존이 비교적 완전한 대형 도시 지도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것으로, 이는 중국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큰 고대 도시평면도이다. 따라서 고대 도시건설, 지방역사와 군사 방어병력 배치 및 중국 지도학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계시는 석각은 모조품입니다.】
코멘트에 참여하고 싶으시거나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실 경우, 다음 QR코드를 스캔하여 계림인포럼을 이용해 주십시오.
【계림 옛이야기】
계림 성지 건설은 ‘탁탑천왕’ 이정으로부터 시작
이정(571—649)의 자는 약사이며 지금의 섬서성 삼원현 사람으로 정관11년(637년), 당태종에 의해 위국공으로 봉해졌다. 당나라 무덕 4년(621년) 말, 이정은 계주(계림의 옛 이름), 풍앙, 이광도 등 현지 할거세력을 귀순시켰으며 조서를 받고 영남도무위대사, 대리계주총관을 맡았다.(『구당서』열전 제17에는 “산 넘어 계주에 사람을 파견하여 투항하게 하였다. 좋은 조건을 제시하여, 세금을 줄여주고 영남도무위대사 직을 맡게 하였다.”고 적혀 있다.) 그는 계주는 남방의 외진 곳으로 조정과 멀리 떨어져 있고 특히, 수나라 말에 대란이 있은 후부터 조정의 혜택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현지 백성들에게 문명 제도를 규범화하고 조정 병력의 강대함을 보여주어야만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계주에서 출발하여 남방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고, 덕망 높은 어르신들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기에 현지인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따라서 사회가 안정되었다. (『신당서』열전 제18에는 “영해는 멀리 떨어져 있어 오랫동안 황제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위풍과 예의를 보여주지 않으면 민풍을 바꾸기 어렵다.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하여 백성들의 질고를 헤아리고 어르신들을 만나 천자의 뜻을 밝히니 모두가 즐거워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정은 사회 안정과 민생을 살폈을 뿐만 아니라 이강 서안, 독수봉 남동쪽을 선택하여 오늘날 동서항 입구를 성 중심으로 정하고 계주 성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정강왕성의 최초의 모습이다. 그때 건축한 계주성은 아성 또는 자성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등선’, ‘동강’, ‘순경’과 ‘계주요좌’ 성문을 설치하였는데 관아아문이 있는 곳이라 ‘시안군성’이라 하였다. 그 둘레는 1.6524 키로미터, 높이는 3.5미터이다. 동시에 ‘경림문’과 ‘용수문’을 수건하였다.
(「계림풍토기」의 기록에 따르면, “계주자성은 위국공때에 짓기 시작했으며, 시안군성이라고 불렀고”, “이강의 서호는 둘레가 삼리 십팔보에 달하고 높이가 일장 이자에 이르며, 등선, 동강, 정강, 순경 등 4대문을 축조하고, 경림사와 용수문을 지었는데 이것이 계림성을 건축하게 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정이 다스린 계림은 ‘소장안’이라고도 불렸다. 『전당시』에 있는 장숙경의 『유계주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창오가 얼마나 먼 곳인지 묻지 말거라. 지금의 길이 험난한 것을어찌하겠는가. 오랑캐의 힘이 닿지 않은 곳이니 작은 장안성이라 해도 무방하다.” 후에 계주 사람들은 섬서성에서 온 관리 이정의 덕정에 감격하여 칠성산 북쪽 산기슭 심원교 옆(지금의 육합)에 이위공의 묘를 짓고 제사를 지냈는데 오늘날 영검로 육합우가 바로 이렇게 생긴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