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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语前尘】宋代静江府城池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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发表于 2017-11-11 10:42:11 | 显示全部楼层 |阅读模式 IP属地:广西
本帖最后由 静若聆音 于 2019-8-18 00:12 编辑


静江城池图

静江城池图

宋代静江府城池图

    石刻在北门鹦鹉山山腹,高3.38米、宽3.24米。据刻于图上方的记文所载“李制使”、“朱经略”、“赵经略”、“今任胡经略”考证,分别为李曾伯、朱禩孙、赵与霦、胡颖等四位筑城官员,从而考定此图为宋代胡颖修筑城池时主持刻绘,并于咸淳八年(1272年)刻成。静江府城池图比例尺为南北方向约1:1000、东西方向约1:750,是反映南宋末年桂林城池规模和城市格局的平面图,以36种绘图符号对城中山、水、城、池、门、楼、沟、渠、亭、台、官署、兵寨、道路、桥梁以及竹木植被等均作出了详实标识,开启符号化绘制地图之先河。同时记载了为抵御蒙古军队的进犯,从宝佑六年(1258)至咸淳七年间,扩建成东至漓江沿岸,南至青带桥,西至骝马山、老人山,北至鹦鹉山、铁封山的城市规模,并“倚山为壁,因江为池”,形成了依山就势,山、水、城融为一体的城市格局。这幅时代较早、保存又较为完整的大型城市地图,在世界上是很少见的,是中国现已知古代最大的城市平面图,对研究古代城市建设、地方历史和军事布防以及中国地图学史具有重要价值。


桂林旧事
桂林城池始建“托塔天王”李靖

    李靖(571—649),字药师,今陕西省三原县人,贞观十一年(637年),被唐太宗封为卫国公。唐代武德四年(621年)末,李靖来到桂州(桂林古称),对冯盎、李光度等当地割据势力进行了招安。期间接到诏书,被授予岭南道抚慰大使、代理桂州总管(《旧唐书》列传第十七载“乃度岭至桂州,遣人分道招抚......优诏劳勉,授岭南道抚慰大使,检校桂州总管”)。李靖认为桂州是南方偏僻之地,距离朝廷过于遥远,特别是从隋代末年大乱以来,从未受到过朝廷的恩惠,如果不引导当地百姓规范文明制度并且展示朝廷兵力的强大,是难以收服民心的。于是他率所部兵马从桂州出发南巡,所经之处,他关怀百姓、访贫问苦、亲自慰问年老有威望的人,得到当地人民的拥护,社会从而得到了安定(《新唐书·列传卷十八》载,“以岭海陋远,久不见德,非震威武、示礼义,则无以变风。即率兵南巡,所过问疾苦,延见长老,宣布天子恩意,远近欢服”)。除了着重于社会稳定、关注民生之外,李靖还选取了漓江西岸、独秀峰东南,大约在今东西巷入口处作为筑城的中心,开始着手新建桂州城池,也就是现存靖江王城的第一次基础成型修建。当时修筑的桂州城又称衙城、子城,初建时设置了“腾仙”、“东江”、“顺庆”和“桂州”4座城门,是官署衙门的所在地,称为“始安郡城”,周长为1.6524公里,高3.5米。同时修建了庆林寺和榕树门(《桂林风土记》载,“桂州子城,自卫国公所制,号曰始安郡城”、“在漓江西浒,周三里十八步,高一丈二尺,开腾仙、东江、静江、顺庆四门。修建庆林寺、榕树门,开桂林城池建筑之先河”)。
    在李靖的治理下,当时的桂州素有“小长安”之称。《全唐诗》中张叔卿的《流桂州诗》写道“莫问苍梧远,而今世路难;胡尘不到处,即是小长安”。后来桂州人有感于李靖这位从陕西来的官员施行的德政,在七星山北麓寻源桥畔(今六合圩)修建了一座李卫公庙进行祭祀。如今的灵剑路六合圩,就是源自百姓自发到庙祭祀李卫公而形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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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龙隐路记》

   
    城之江东有东江,江畔山唤月牙,西南洞、岩各一;世称洞曾隐龙,洞顶龙鳞脊印蜒蜿贯彻,风云吸习、屈曲潜通,喻作回穴。有桥邻洞南、凌东江,遂衍成一路东去二里。洞、岩、桥、路皆名龙隐。今丁酉年间,桂林政通人和,使城内山水好景争显新貌,提升改造龙隐路为其一。周南太史书、捭阖之石刻呼之将出,摹现于路,由是为记。
    传曰时值天地混沌,有苍穹之北斗坠地顿化二山七峰,形呈七星。山其一之月牙,浸润漓水日月精华,神龙舞来,伴霞择栖。一旦走石飞沙、雷鸣电闪,龙既亢而醒。破壁而飞,驾云十万里,东去西循,遍寻乾坤,竟再无适栖之地。且自南悔返,行将回穴时莽撞踏破一山,以穿山名。漓水悠悠,刹那转无尽生灭,神龙既隐,水则愈灵。过往逾千年始,墨客贤人踏歌步越东江,每留笔墨诗赋,终使龙隐洞、岩摩崖殆遍,壁无完石,遂造甲天下之唐宋题名渊薮,成看山游山、观画读史之胜地。引莫休符《桂林风土记》、范成大《桂海虞衡志》、张鸣凤《桂胜》纷各书志其韵。“破壁才知龙隐处、游山方悉太史书”,登望龙台上,最盼秋风,城花木樨吐蕊、金黄万点、留客不言、芳溢十里。此番镂墙透绿、山塘成景、光影相缀、使人流连。
    夫江东久为宜居福地,之所以龙隐;善政秉持服务求精,之所以七星。兹初心不忘,恪守为民之责、修复山水生态、串拾散珠碎玉、传承千年人文。使百姓以地域而认同、以文化而自信,岂非正所为耶?

                                                                        周    琥
                                                                     二〇一七年十二月


后  记


    与桂林山水一样“甲天下”的,还有桂林石刻。而与桂林石刻一样沉淀在岁月流光里的,还有发生在桂林这片土地上的旧事。虞舜、马援、李靖、狄青、鉴真、黎桓、赵构、妥欢帖木儿、靖江王、孔四贞、孙中山等一个个历代重要历史人物对桂林的影响,远非在这里展示的40块仿制石刻与故事就能够娓娓道尽的。关于他们,我们总想多述说一些、再多述说一些。因为在龙隐路上,让游客能更多地了解桂林历史文化、爱上桂林这个地方,让市民进一步提升地域认同、增强文化自信,是我们在本次改造工程中精益求精、风雨兼程的动力。
    为传承桂林石刻文化,我们还从2017年“漫卷诗话山水情”桂林原创诗词短文征集大赛活动中择取了部分作品,勒石于此,谨法古人。
    本次改造工程有赖于桂林图书馆、桂林生活网、桂管群、广西师范大学外国语学院、市漓管委、七星景区管理处、桂海碑林博物馆的帮助,同时在专业方面还得到了凌世君、林哲、林志捷、秦冬发、王晶、毛建军、杨曦明、黄柯等诸位贤达的悉心指导。在此一并致谢!

                                                        桂林市七星区特色街区改造指挥部
                                                        指 挥 长:石玉琳、郑  平
                                                        副指挥长:周  琥
                                                        二〇一七年十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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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楼主| 发表于 2018-1-26 15:49:34 | 显示全部楼层 IP属地:广西
本帖最后由 静若聆音 于 2018-6-13 22:01 编辑

感谢广西师范大学外国语学院组织的翻译工作

[日文]

宋代の静江府地図

原型の石刻は北門の鸚鵡山の山腹に彫刻してあり、高さは3.38メートル、幅は3.24メートルです。地図の上に記載された「李制使」、「朱経略」、「経略」、「今任胡経略」は考証によると、町を建てる官吏の李曽伯、朱禩孫、霦、胡颖四人だと判明しました。それによってこの地図は宋代咸淳八年(1272年)胡颖が築城する時に命じて彫刻しておいたものだと分かります。静江府地図は南北方向に千分の1の縮尺で、東西方向には750の1の縮尺です。この地図は南宋末期の桂林城の規模と構造が見られ、製図マークが総計36種で、町中の山、水、垣、堀、門、楼、溝、亭、台、官府、駐屯所、道、橋や植生などについて詳しく描かれており、マーク化地図の先駆けとされています。同時に記載されているのは、モンゴル軍隊の侵略を防ぐために、宝佑六年(1258年)から咸淳七年の間に、桂林城を東に漓江岸辺、南に青帯橋、西に騮馬山、老人山、北に鸚鵡山、鉄封山とした        範囲まで増築し、「山を垣にして、江を堀にする」と、地形を利用して山水と一体になる町の構造です。これほど時代が早く、そしてうまく保存された大型の町平面図は世界中でも珍しいもので、中国現存の最大な古代町平面図でもあり、古代町の建設や地方歴史、軍事防御についての知識を知る上に、そして中国地図学史の研究にも重要な価値があります。


「塔を手に乗せる天王」李靖により桂林城が建て初められた

 李靖(571-649)、字は薬師で、今の陝西省三原県の人です。貞観十一年(637年)、唐太宗により衛国公と任命されました。唐代武徳四年(621年)末、李靖は桂州(即ち今の桂林)まで来て、冯盎、李光度などの当地の顔役を朝廷に服従させるようにしました。その期間、彼は詔書を受け、嶺南道撫慰使と授けられ、桂州の事務を代理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旧唐書』の伝記第十七には「乃度岭至桂州,遣人分道招撫······優詔労勉,授嶺南道撫慰大使,检校桂州総管。」と記載されている)桂州は南方にある辺鄙な所で朝廷からはあまりにも遠いです。特に隋の戦乱以来、朝廷から恩恵を受けることは一度もなかったので、もし当地の民を規範と文明の道に導かないで、朝廷の武力を展示しなければ、民心を収めるのは難しいことだろうと李靖が思っていました。ゆえに麾下の兵士を連れて桂州から出発し、南へと巡視しました。至る所に民を同情し、貧乏人を訪ね、年老いた賢者を自ら訪問して、当地の人の支持を受けて、社会を安定させました。(『新唐書』の伝記十八には「以岭海陋遠,久不見德,非震威武、示礼義,則無以変風。即率兵南巡,所過問疾苦,延見长老,宣布天子恩意,遠近歓服。」と記載されている)社会の安定、人民の生活に着目する他に、李靖は漓江の西岸、独秀峰の東南、大抵今の東西巷の入口のところを中心に桂州の新しい城を建て始め、それはつまり今の靖江王城の一回目の築城です。当時建てた桂州城は衙城、子城と呼ばれ、官府の役所となり、「始安郡城」とも呼ばれました。最初には「腾仙」、「東江」、「順慶」と「桂州」の四門を設置し、城壁は周長が.6524キロメートル、高さは3.5メートルです。同時に慶林寺と榕樹門を建てました。(『桂林風土記』には「桂州子城,自衛国公所制,号曰始安郡城。」、「在漓江西浒,周三里十八步,高一丈二尺,開腾仙、東江、静江、順慶四門。修建慶林寺、榕树門,開桂林城池建筑之先河。」と記載されている)
 李靖の管理の下で、桂林は「二番目の長安」と呼ばれていました。『全唐詩』に記載されている張叔卿の『桂州に流放された時の詩』には「莫問苍梧遠、而今世路难、胡尘不到処、即是小长安」と書かれております。その後、桂州には李靖という陝西省から来た官吏が実行した徳政を記念するために、七星山の北麓にある尋源橋(今は六合圩)の近くに李衛公廟が建ててあります。今の霊剣路六合圩(圩は市場のこと)は百姓が自発的に李衛公を祭祀することから発源し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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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楼主| 发表于 2019-6-23 00:44:42 | 显示全部楼层 IP属地:广西
송나라 정강부 성지도
원 석각은 북문 앵무산 중턱에 있으며 높이는 3.38 미터, 너비는 3.24미터이다. 그림 위에 있는 ‘이제사’, ‘주경략’, ‘조경략’, ‘금임호경략’은 각각 이증백, 주사손, 조여빈, 호영 등 네 명의 축성 관원을 가리킨다. 이로부터 그림은 함순 8년에 송나라 호영이 축성하면서 그린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강부 성지도의 축척은 남북 방향 약 1:1000, 동서 방향 약 1:750이다. 남송 말년, 계림 성지의 규모와 도시 구도를 반영한 평면도는 36개의 도판 기호로 산, 수, 성, 지, 문, 누, 구, 거, 정,대, 관서, 병채, 도로, 교량과 식물피복에 대해 상세하게 표기함으로써 기호화 제도의 첫 사례가 되었다. 성지도에는 또한 몽골군의 침범을 막기 위해, 보우 6년부터(1258) 함순 7년까지 계림성을 확장하였는데 동쪽은 이강 연안, 남쪽은 청대교, 서쪽은 유마산, 노인산, 북쪽은 앵무산, 철봉산까지였다고 적혀 있다. 이로부터 “산을 벽으로 삼고, 강을 못으로 삼아” 산세의 흐름에 따라 산, 수, 성이 어우러진 계림 도시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대가 이르고, 보존이 비교적 완전한 대형 도시 지도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것으로, 이는 중국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큰 고대 도시평면도이다. 따라서 고대 도시건설, 지방역사와 군사 방어병력 배치 및 중국 지도학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계시는 석각은 모조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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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 옛이야기】
계림 성지 건설은 ‘탁탑천왕’ 이정으로부터 시작
이정(571—649)의 자는 약사이며 지금의 섬서성 삼원현 사람으로 정관11년(637년), 당태종에 의해 위국공으로 봉해졌다. 당나라 무덕 4년(621년) 말, 이정은 계주(계림의 옛 이름), 풍앙, 이광도 등 현지 할거세력을 귀순시켰으며 조서를 받고 영남도무위대사, 대리계주총관을 맡았다.(『구당서』열전 제17에는 “산 넘어 계주에 사람을 파견하여 투항하게 하였다. 좋은 조건을 제시하여, 세금을 줄여주고 영남도무위대사 직을 맡게 하였다.”고 적혀 있다.) 그는 계주는 남방의 외진 곳으로 조정과 멀리 떨어져 있고 특히, 수나라 말에 대란이 있은 후부터 조정의 혜택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현지 백성들에게 문명 제도를 규범화하고 조정 병력의 강대함을 보여주어야만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계주에서 출발하여 남방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고, 덕망 높은 어르신들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기에 현지인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따라서 사회가 안정되었다. (『신당서』열전 제18에는 “영해는 멀리 떨어져 있어 오랫동안 황제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위풍과 예의를 보여주지 않으면 민풍을 바꾸기 어렵다.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하여 백성들의 질고를 헤아리고 어르신들을 만나 천자의 뜻을 밝히니 모두가 즐거워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정은 사회 안정과 민생을 살폈을 뿐만 아니라 이강 서안, 독수봉 남동쪽을 선택하여 오늘날 동서항 입구를 성 중심으로 정하고 계주 성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정강왕성의 최초의 모습이다. 그때 건축한 계주성은 아성 또는 자성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등선’, ‘동강’, ‘순경’과 ‘계주요좌’ 성문을 설치하였는데 관아아문이 있는 곳이라 ‘시안군성’이라 하였다. 그 둘레는 1.6524 키로미터, 높이는 3.5미터이다. 동시에 ‘경림문’과 ‘용수문’을 수건하였다.
(「계림풍토기」의 기록에 따르면, “계주자성은 위국공때에 짓기 시작했으며, 시안군성이라고 불렀고”, “이강의 서호는 둘레가 삼리 십팔보에 달하고 높이가 일장 이자에 이르며, 등선, 동강, 정강, 순경 등 4대문을 축조하고, 경림사와 용수문을 지었는데 이것이 계림성을 건축하게 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정이 다스린 계림은 ‘소장안’이라고도 불렸다. 『전당시』에 있는 장숙경의 『유계주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창오가 얼마나 먼 곳인지 묻지 말거라. 지금의 길이 험난한 것을어찌하겠는가. 오랑캐의 힘이 닿지 않은 곳이니 작은 장안성이라 해도 무방하다.” 후에 계주 사람들은 섬서성에서 온 관리 이정의 덕정에 감격하여 칠성산 북쪽 산기슭 심원교 옆(지금의 육합)에 이위공의 묘를 짓고 제사를 지냈는데 오늘날 영검로 육합우가 바로 이렇게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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