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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语前尘】宋代方信孺七星岩题名石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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发表于 2017-11-15 01:01:27 | 显示全部楼层 |阅读模式
本帖最后由 静若聆音 于 2019-8-18 00:06 编辑


方信孺游

方信孺游


自校对碑文 方信孺游.png


宋代方信孺七星岩题名石刻

    原石刻高1.67米、宽1.67米,位于七星岩(曾称栖霞洞),刻于嘉定七年(1214年),文字内容为“方信孺游。嘉定甲戌七月既望,刻于静江府栖霞洞”。方信孺在桂林留下了大量的石刻,仅在桂林市区范围内留存的石刻就有二十多件,为一段时期内桂林历史文化和石刻文化的传承发展做出了重要贡献,因此也被后人称为“桂林石刻第一人”。


桂林旧事

方信孺建世节堂以示世代保持清正廉洁的节操


    方信孺(1177—1222年),字孚若,今福建省莆田市华亭镇霞皋村人。南宋嘉定七年(1214年),信孺由广南西路提点刑狱改任广南西路转运判官,其父崧卿在二十年前也在桂林担任过同样的职务方崧卿于南宋绍熙二年(1191年)任广南东路提点刑狱、绍熙三年(1192年)转任广南西路转运判官)。菘卿与信孺在任期间都清正廉洁,积极访贫问苦、关注百姓民生,受到百姓的欢迎和爱戴。为纪念、褒扬先父在桂功绩,将原桂林老百姓为感恩菘卿而在城南永宁寺慈氏阁(今文昌桥万寿巷舍利塔一带)所立祠堂扩建修缮,并请来莆田人柯梦得编撰《方公祠堂迎送神曲》。每当春秋两季祭祀,桂林当地百姓都自发将方菘卿的画像贴出来奉祀(《后村先生大全集·卷之一百六十六(宝谟寺丞诗境方公)》称,“父老即永宁寺西庑祠京西公,文公词伯,俱有歌咏记述焉”;宋代叶适《水心集·京西运判方公神道碑》称,“为广西提刑、运判,继公行部。父老迎拜,悲喜既,相与画公像,春秋报祠”)。后来方信孺还将其父亲曾经办公的地方重新修缮,定名为“世节堂”,并请当代学者易祓书写匾额“世节堂”三个大字和“嘉定八年二月吉、莆田方信孺新桂林西漕台、厅事为世节堂、长沙易袚书扁、磨崖于龙隐岩”等字,刻于龙隐岩的崖壁上。以此来追念其父亲在桂林的德政,警醒和勉励自己忠于职守,同时借“世节堂”表达自己继承父亲廉政为官的决心。

《后村先生大全集·卷之一百六十六(宝谟寺丞诗境方公)》称,“父老即永宁寺西庑祠京.png

宋代叶适《水心集·京西运判方公神道碑》称,“为广西提刑、运判,继公行部。父老迎拜.png

宋代叶适《水心集·京西运判方公神道碑》称,“为广西提刑、运判,继公行部。父老迎拜.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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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龙隐路记》

   
    城之江东有东江,江畔山唤月牙,西南洞、岩各一;世称洞曾隐龙,洞顶龙鳞脊印蜒蜿贯彻,风云吸习、屈曲潜通,喻作回穴。有桥邻洞南、凌东江,遂衍成一路东去二里。洞、岩、桥、路皆名龙隐。今丁酉年间,桂林政通人和,使城内山水好景争显新貌,提升改造龙隐路为其一。周南太史书、捭阖之石刻呼之将出,摹现于路,由是为记。
    传曰时值天地混沌,有苍穹之北斗坠地顿化二山七峰,形呈七星。山其一之月牙,浸润漓水日月精华,神龙舞来,伴霞择栖。一旦走石飞沙、雷鸣电闪,龙既亢而醒。破壁而飞,驾云十万里,东去西循,遍寻乾坤,竟再无适栖之地。且自南悔返,行将回穴时莽撞踏破一山,以穿山名。漓水悠悠,刹那转无尽生灭,神龙既隐,水则愈灵。过往逾千年始,墨客贤人踏歌步越东江,每留笔墨诗赋,终使龙隐洞、岩摩崖殆遍,壁无完石,遂造甲天下之唐宋题名渊薮,成看山游山、观画读史之胜地。引莫休符《桂林风土记》、范成大《桂海虞衡志》、张鸣凤《桂胜》纷各书志其韵。“破壁才知龙隐处、游山方悉太史书”,登望龙台上,最盼秋风,城花木樨吐蕊、金黄万点、留客不言、芳溢十里。此番镂墙透绿、山塘成景、光影相缀、使人流连。
    夫江东久为宜居福地,之所以龙隐;善政秉持服务求精,之所以七星。兹初心不忘,恪守为民之责、修复山水生态、串拾散珠碎玉、传承千年人文。使百姓以地域而认同、以文化而自信,岂非正所为耶?

                                                                        周    琥
                                                                     二〇一七年十二月


后  记


    与桂林山水一样“甲天下”的,还有桂林石刻。而与桂林石刻一样沉淀在岁月流光里的,还有发生在桂林这片土地上的旧事。虞舜、马援、李靖、狄青、鉴真、黎桓、赵构、妥欢帖木儿、靖江王、孔四贞、孙中山等一个个历代重要历史人物对桂林的影响,远非在这里展示的40块仿制石刻与故事就能够娓娓道尽的。关于他们,我们总想多述说一些、再多述说一些。因为在龙隐路上,让游客能更多地了解桂林历史文化、爱上桂林这个地方,让市民进一步提升地域认同、增强文化自信,是我们在本次改造工程中精益求精、风雨兼程的动力。
    为传承桂林石刻文化,我们还从2017年“漫卷诗话山水情”桂林原创诗词短文征集大赛活动中择取了部分作品,勒石于此,谨法古人。
    本次改造工程有赖于桂林图书馆、桂林生活网、桂管群、广西师范大学外国语学院、市漓管委、七星景区管理处、桂海碑林博物馆的帮助,同时在专业方面还得到了凌世君、林哲、林志捷、秦冬发、王晶、毛建军、杨曦明、黄柯等诸位贤达的悉心指导。在此一并致谢!

                                                        桂林市七星区特色街区改造指挥部
                                                        指 挥 长:石玉琳、郑  平
                                                        副指挥长:周  琥
                                                        二〇一七年十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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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楼主| 发表于 2018-1-26 15:58:11 | 显示全部楼层
本帖最后由 静若聆音 于 2018-6-13 22:26 编辑

感谢广西师范大学外国语学院组织的翻译工作
【日文】


七星岩にある宋代方信孺の石刻


 原型の石刻は高さ1.67メートル、幅1.67メートル、七星岩(栖霞洞とも呼ばれたことがある)にあり、嘉定七年(1214年)に刻まれたものです。その内容は「方信孺游。嘉定甲戌伍月既望,刻于静江府栖霞洞」(方信孺、栖霞洞を遊覧、嘉定甲戌五月十六日、静江府栖霞洞に刻む)です。方信孺は桂林に数多くの石刻を残し、桂林市内だけに残った石刻が20余あり、桂林の歴史文化と石刻文化の伝承及び発展に重要な貢献をし、后世の人々に「桂林石刻第一人」と称されています。

方信孺は世代に清廉で公正な節操を保持するために、世節堂を建立した

 方信孺(1177—1222年)は、字が孚若、今の福建省蒲田市華亭鎮霞皐村の人。信孺は南宋嘉定七年(1214年)に広南西路提点刑獄(中国古代官名)から広南西路転運判官(中国古代官名)に変わり、その父親の崧卿が二十年前に桂林で同じ職務を担任しました(方崧卿は南宋紹熈二年(1191年)に広南東路提点刑獄に務め、紹熈三年(1192年)に広南西路転運判官に転任した)。崧卿及び信孺二人で在任期間に清廉で公正で、貧苦な人を積極的に訪れ、百姓の生活に関心を持ち、庶民の歓迎及び敬愛を受けました。父親の桂林滞在の功績を記念して称揚するために、百姓は崧卿に感謝するために桂林城の南面の永寧慈寺氏閣(今の文昌橋萬寿巷舎利塔の辺り)にある祠堂を増築して修繕し、また蒲田人の柯夢得に『方公祠堂迎送神曲』を編纂されました。春秋に祀るたびに、桂林の現地人は方崧卿の画像を自発的に貼って祀ります(『後村先生大全集·一百六十六巻(宝謨寺丞詩境方公)』の中に「父老即永寧寺西庑祠京西公、文公詞伯、俱有歌詠記述焉」という記述がある;宋代葉適『水心集·京西運判方公神道碑』には、「為広西提刑、運判、継公行部。父老迎拝悲喜、既相与画公像」と記載された)。後来、方信孺はまた父親がかつて業務のところを修繕し直し、これから「世節堂」という名を付けました。学者である易祓に「世節堂」という3つ字の横額及び「嘉定八年二月吉、蒲田方信孺新桂林西漕台、庁事為世節堂、長沙易祓書扁、磨崖于龍隠岩」などの字を書かれた、そして龍隠岩の崖に刻まれました。方信孺はこれで父親の桂林滞在の徳政を記念し、自分の職務の忠実を警戒して励ますと同時に、官員とする父親の廉潔公正の精神を継承するために、「世節堂」で自分の決心を示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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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楼主| 发表于 2019-6-23 00:41:00 | 显示全部楼层
송나라 방신유의 칠성암 제명석각
원 석각은 높이1.67미터, 너비 1.67미터로, 칠성암(옛 이르은 서하동)에 있다. 가정7년(1214)에 만들어진 것으로, “방신유가 가정갑무 5월 16일에 정강부 서하동에 새겼다.” 는 글이 적혀 있다.
방신유는 계림에 많은 석각을 남겼다. 그중 계림 시내에 남아 있는 석각만 20개 되는데 계림의 역사 문화와 석각 문화의 전승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를 “계림 석각의 1인자” 라고 한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계시는 석각은 모조품입니다.】
코멘트에 참여하고 싶으시거나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실 경우, 다음 QR코드를 스캔하여 계림인포럼을 이용해 주십시오.
【계림 옛이야기】
대대로 지켜온 청렴한 절개를 보여주기 위해 방신유가 세절당을 세우다
방신유(1177년-1222년)는 자가 부약이며 지금의 복건성 보전시 화정진 하고촌에서 태어났다. 남송 가정7년(1214년)에 광남서로 제형에서 광남서로 전운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부친 청경도 20년 전 계림에서 같은 업무를 담당했었다.(방청경은 남송 소희2년(1191년)에 광남동로 제형으로 임명되었고 소희3년(1192년)에는 광남서로 전운판관으로 임명되었다.)
송경과 신유는 재임 기간에 청렴하였으며 백성들의 고통을 잘 살피고 민생에 심혈을 기울여 백성들의 환영과 추대를 받았다. 해마다 봄과 가을 제사철이면 계림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방송경의 초상화를 붙이고 제사를 지낸다. (『후촌선생대전집·제166권(보모사승시경방공)』에서는 “어르신은 영녕사 서무사당 경서공이고, 문장의 대가로 문공이라 불렸는데 모두 노래로 기술하고 있다.”고 하였다. 송나라 엽적의 『수심집·경서운판방공신도비엽적』에서는 “광서성의 제형, 운판관으로 있다가 후에 아버지 뒤를 이어 행부가 되었다. 백성들은 예배를 드리면서 희비가 엇갈렸고 봄과 가을이 되면 방송경의 초상화를 들고 사당으로 찾아간다.”고 하였다.)
방신유는 후에 부친이 근무하던 곳을 다시 보수하고 ‘세절당’이라 하였으며 역불이라는 학자를 청해 ‘세절당’이라는 글자와 “가정8년 2월, 보전 방신유가 계림 세조대에서 사무를 보았는데 세절당이라고 하였으며, 장사의 역불이 이 사실을 영은암 절벽에 써놓았다.” 라는 글을 용은암 암벽에 새기게 하였다. 이를 통해, 계림에서의 부친의 덕정을 추념하고 스스로 직책을 충실하게 수행하도록 격려하고자 했으며 동시에, ‘세절당’을 통해 부친의 청렴한 성품을 계승하려는 본인의 강한 의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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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楼主| 发表于 2019-8-17 22:29:42 | 显示全部楼层
原据有关文字记载文字内容为“方信孺游。嘉定甲戌伍月既望,刻于静江府栖霞洞”经冬发兄指正及实地查勘实为“方信孺游。嘉定甲戌七月既望,刻于静江府栖霞洞”。特及时修改并作此说明。幸而因龙隐路改造时为仿制原碑并无错误,尚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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发表于 2019-8-19 23:14:27 | 显示全部楼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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