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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语前尘】宋代吕渭《养气汤方》石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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发表于 2017-11-15 01:04:32 | 显示全部楼层 |阅读模式
本帖最后由 静若聆音 于 2019-8-18 00:05 编辑


养气汤方

养气汤方
宋代吕渭刻《养气汤方》


    原石刻位于南溪山刘仙岩,高0.43米,宽0.65米,宋代宣和四年( 公元1122年) 由当时掌管广西粮仓和农田水利方面的广南西路提举常平吕渭所刻。《养气汤方》石刻向当地推广避免感染“岚瘴”之病的药方,同时对药方的来源、成分、用量、制法和服用方法以及疗效等都做了详细说明,对于后世研究传统中医药学具有较高的文献价值,是岭南地区唯一现存的宋代药方石刻。


桂林旧事
昭州知府梅挚的反腐檄文《五瘴说》

    岭南一带是宋代谪贬官员被流放的边远地区之一。当时的岭南地区,森林密布,春夏累积的地表水汽久淤不散,形成“瘴岚”之气,容易引发疫病,人一旦染此病,多有不治而亡的情况。因此流传身中岭南瘴气者必死的说法,而当时广西又被称之为“瘴疠之乡”。宋代景佑元年1034年龙图阁学士梅挚在昭州(今桂林平乐县)担任知府时,写下了反腐檄文《五瘴说》,借自然之“瘴疠”、抨击官场“瘴疠”,直斥针砭当时存在的“租赋之瘴、刑狱之瘴、饮食之瘴、货财之瘴和帷薄之瘴”,引申论述了“自然界的瘴气也许能使人病亡,但官场上的腐败却比瘴气更为可怕”的观点。《五瘴说》面世一百五十多年后的宋代绍熙元年(1190年),广南西路转运使朱晞颜认为梅挚这篇文章切中时弊,对官员非常有教育意义,于是撰写跋文、编辑成《龙图梅公瘴说》,请人刻在龙隐岩龙隐洞之间的壁上。在宋代,《龙图梅公瘴说》旁边的小路恰好是官员们出东城观稼,履行劝农公务的必经之地。这件反腐倡廉的石刻置于此地,几百年来对来来往往、路经此地的官员起了一定的劝诫作用。1953年,郭沫若也来到这里,对着《龙图梅公瘴说》石刻沉思良久,后来在登上古南门的时候,留下了“榕树楼头四壁琛,梅公瘴说警人心”的诗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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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龙隐路记》

   
    城之江东有东江,江畔山唤月牙,西南洞、岩各一;世称洞曾隐龙,洞顶龙鳞脊印蜒蜿贯彻,风云吸习、屈曲潜通,喻作回穴。有桥邻洞南、凌东江,遂衍成一路东去二里。洞、岩、桥、路皆名龙隐。今丁酉年间,桂林政通人和,使城内山水好景争显新貌,提升改造龙隐路为其一。周南太史书、捭阖之石刻呼之将出,摹现于路,由是为记。
    传曰时值天地混沌,有苍穹之北斗坠地顿化二山七峰,形呈七星。山其一之月牙,浸润漓水日月精华,神龙舞来,伴霞择栖。一旦走石飞沙、雷鸣电闪,龙既亢而醒。破壁而飞,驾云十万里,东去西循,遍寻乾坤,竟再无适栖之地。且自南悔返,行将回穴时莽撞踏破一山,以穿山名。漓水悠悠,刹那转无尽生灭,神龙既隐,水则愈灵。过往逾千年始,墨客贤人踏歌步越东江,每留笔墨诗赋,终使龙隐洞、岩摩崖殆遍,壁无完石,遂造甲天下之唐宋题名渊薮,成看山游山、观画读史之胜地。引莫休符《桂林风土记》、范成大《桂海虞衡志》、张鸣凤《桂胜》纷各书志其韵。“破壁才知龙隐处、游山方悉太史书”,登望龙台上,最盼秋风,城花木樨吐蕊、金黄万点、留客不言、芳溢十里。此番镂墙透绿、山塘成景、光影相缀、使人流连。
    夫江东久为宜居福地,之所以龙隐;善政秉持服务求精,之所以七星。兹初心不忘,恪守为民之责、修复山水生态、串拾散珠碎玉、传承千年人文。使百姓以地域而认同、以文化而自信,岂非正所为耶?

                                                                        周    琥
                                                                     二〇一七年十二月


后  记


    与桂林山水一样“甲天下”的,还有桂林石刻。而与桂林石刻一样沉淀在岁月流光里的,还有发生在桂林这片土地上的旧事。虞舜、马援、李靖、狄青、鉴真、黎桓、赵构、妥欢帖木儿、靖江王、孔四贞、孙中山等一个个历代重要历史人物对桂林的影响,远非在这里展示的40块仿制石刻与故事就能够娓娓道尽的。关于他们,我们总想多述说一些、再多述说一些。因为在龙隐路上,让游客能更多地了解桂林历史文化、爱上桂林这个地方,让市民进一步提升地域认同、增强文化自信,是我们在本次改造工程中精益求精、风雨兼程的动力。
    为传承桂林石刻文化,我们还从2017年“漫卷诗话山水情”桂林原创诗词短文征集大赛活动中择取了部分作品,勒石于此,谨法古人。
    本次改造工程有赖于桂林图书馆、桂林生活网、桂管群、广西师范大学外国语学院、市漓管委、七星景区管理处、桂海碑林博物馆的帮助,同时在专业方面还得到了凌世君、林哲、林志捷、秦冬发、王晶、毛建军、杨曦明、黄柯等诸位贤达的悉心指导。在此一并致谢!

                                                        桂林市七星区特色街区改造指挥部
                                                        指 挥 长:石玉琳、郑  平
                                                        副指挥长:周  琥
                                                        二〇一七年十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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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楼主| 发表于 2018-1-26 16:00:36 | 显示全部楼层
本帖最后由 静若聆音 于 2018-6-13 22:28 编辑

感谢广西师范大学外国语学院组织的翻译工作

【日文】
宋代呂渭の『養気湯方』


 原型の石刻は南渓山劉仙岩にあり、高さ0.43メートル、幅0.65メートル、宋代宣和四年(1122年)、当時の広西穀倉及び農地水利を司った広南西路提挙常平(古代官名)の呂渭により彫刻されたものです。『養気湯方』(養生の処方)は庶民に「嵐瘴」(瘴気)の感染を避ける処方で、処方の由来・成分・用量・製法や使用方法および効果などを詳しく説明しています。これは後世の伝統の漢方薬学の研究に高い文献の価値があり、現存する嶺南での唯一の宋代処方の石刻です。



昭州知府梅摯の腐敗反対の檄『五瘴説』

 嶺南一帯は宋代に左遷された官員が追放された辺ぴな地区の一つです。当時の嶺南地区は森林が垂れ込め、春夏に累積した地表水は長期的に堆積し消えなく、「嵐瘴」の気になります。そして疫病を引き起こしやすく、人々はこのような疫病になると、だいたい治せずに死んでしまったことがあります。それで嶺南瘴気になった人は必ず死んだという伝説があり、当時に広西は「瘴疠の郷」と呼ばれました。龍図閣学士である梅摯は宋代景佑元年(1034年)に昭州(今の桂林平楽県)で知府を担任した時、「五瘴説」という腐敗反対の檄を書き、自然の「瘴疠」で官界の「瘴疠」を非難し、当時に存在した「租税の瘴・刑獄の瘴気・飲食の瘴気・貨財の瘴気・帷の瘴気」を直接的に批判し、「自然界の瘴気は人に死亡させるかもしれない、官界の腐敗は瘴気より怖いである」という見方を更に論述した。宋代紹熈元年(1190)はすなわち一百五十年後に『五瘴説』を発表されました。広南西路転運使である朱晞顔は梅摯の文章が社会の弊害を表すと考え、官員にとって、教育の意義を持ち、そこで跋文をかき、『龍図梅公瘴説』を編集し、他の人に龍隠岩と龍隠洞との間の壁に彫刻してもらいました。宋代に『龍図梅公瘴説』の側の道は官員たちが東城から出、農作物の視察及び農業の生産の励ます公務を履行する時に通らなければならない道です。この腐敗反対、清廉提唱についての石刻はここに置き、数百年以来、行ったり来たり及びこのところを経る官員に勧戒の役割を果たしました。1953年、郭沫若はここに来た、『龍図梅公瘴説』という石刻に向けて長い思いをしました。それから、古南門に登った時、「榕樹楼頭四壁琛,梅公瘴説警人心」という詩句を残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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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楼主| 发表于 2019-6-23 00:40:27 | 显示全部楼层
송나라 여위의 『양기탕방』
원 석각은 남계산 유선암에 있는데 높이 0.43미터, 너비 0.65미터로, 송나라 선화4년(기원 1122년) 광서의 곡식 창고와 농경지 수리 시설분야를 담당했던 광남서로 제거상평 여위가 조각한 것이다.
『양기탕방』석각은 ‘남장’이라는 질병의 감염을 피할 수 있는 처방을 널리 알렸으며 처방의 내원, 성분, 용량, 제조방법과 복용방법 그리고 치료 효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는 전통 중의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문헌적 가치가 있으며 영남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송나라 시기 약처방을 새긴 석각이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계시는 석각은 모조품입니다.】
코멘트에 참여하고 싶으시거나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실 경우, 다음  QR코드를 스캔하여 계림인포럼을 이용해 주십시오.
【계림 옛이야기】
소주지부 매지의 반부패 격문 『오장설』
영남 지역은 송나라 시기에 강직된 관리들을 유배보내는 변방지역의 하나이다. 당시 영남지역은 삼림이 우거지고 봄과 여름 내내 누적된 수증기가 오랫동안 흩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장란’이라는 기가 형성되었다. ‘장란’은 쉽게 질환을 초래하는데 이 병에 걸리면 마땅한 치료 방법이 없어 사람들이 많이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남 장란에 감염된 사람은 무조건 죽는다는 말까지 생겨났고 광서는 “장려의 고향”이라고도 불렸다. 송나라 경우원년(1034년), 소주(지금의 계림시 평락현)에서 지부를 맡은 용도각 학사 매지는 부패를 반대하는 격문 『오장설』을 썼다. 그는 관리 사회의 추악함을 자연계의 ‘장력’에 비유하면서 당시 “각종 세금을 강제로 받아들이고 나쁜 짓을 일삼으며 떠벌여 먹고 마시면서 백성의 재물을 탈취하고 여색을 좋아하는”탐관들을 질책하였다. 그리고 “자연계의 장기는 사람을 병에 걸려 죽게 하지만 관리 사회의 부패는 그런 장기보다 훨씬 더 무섭다.” 고 했다.
『오장설』이 나오고 150여 년이 지난 후 송나라 소희원년(1190년), 광남서로 전운사 주희안은 매지의 글은 그 시대의 폐단을 제대로 꼬집어 관리들에게 교육적 의의가 있다고 여겨 발문을 쓰고 「용도매공장설」이라는 을 용은암과 용은동 사이 암벽에 새겨놓게 하였다.
송나라 때, 관리들이 성을 나가 공무를 집행하려면「용도매공장설」석각 옆길을 꼭 지나다녀야 했다. 부패를 반대하고 청렴을 제창한 이 석각은 수 백 년간 이곳을 지나는 관리들을 깨우쳐 주었다. 1953년, 이곳을 찾은 곽말약은 한동안 깊은 사색에 잠겼으며 고남문에 오르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아름드리 용나무 하늘 높이 자라고, 매공의 장설은 사람들을 일깨워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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